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||[[파일:s6c6g8U.jpg|width=100%]]|| || 1862년, 조지 커스터와 그의 동료들. 흑백 사진에 색을 입혀 칼라로 복원한 것이다.[br]오른쪽 밑의 [[개]]와 함께 반쯤 누워 있는 남자가 커스터. || 아버지인 이매뉴얼은 [[독일계 미국인]]이며, 어머니인 메리는 [[스코틀랜드]]계와 [[아일랜드]]계 혈통이 반씩 섞였다. 젊은 시절에는 그저그런 [[미국육군사관학교|육사]][[사관생도|생도]]였다. 성적은 34명 중 최하위였으며,[* 원래는 79명이었지만, 23명은 학업적인 이유로, 22명은 남부연방으로 전향하기 위해 자퇴했다.] 4년간 사관학교에서 무려 벌점 726점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. 결국 당직 근무 중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[[군사재판]]에 회부되지만 [[남북전쟁]]이 발발하자 풀려나와 [[미합중국 육군]] [[기병]] [[장교]]로 근무하게 된다. 신통찮은 생도였지만 전장에서의 커스터는 매우 유능하고 용감한 장교였다. 최연소 [[장군]]으로서, 커스터가 속한 [[기병대]]는 [[게티즈버그 전투]] 당시 그 [[젭 스튜어트]]를 상대로 대등히 싸우는 등 [[로버트 E. 리]] 장군의 [[남부연합]]군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. [[남북전쟁]]에서 세운 공으로 순식간에 [[소장]] 계급까지 달았는데, 이 장군 계급은 어디까지나 전시 중의 임시 계급이었고, 종전과 함께 원래 계급인 중령으로 환원된다.[* 미국은 예전부터 전시에 급격히 군이 팽창하면 일단 현역 장교들에게 임시 계급을 주어 고위직을 맡겼다가, 전쟁이 끝나고 군 규모가 다시 줄어들면 원래 계급으로 환원시켜 계급 [[인플레]] 문제를 방지하곤 했다.] 종전 후 [[1874년]], [[제7기병대]]를 거느리고 [[인디언 전쟁]]에 종사하던 커스터 중령은 대규모 탐험대를 이끌고 [[다코타]] 지방으로 파견되었다. 탐험대는 이 지방에 있는 [[수우]] 족의 [[성지]]인 블랙힐스에 엄청난 [[금광]]이 있음을 보고했고 백인들이 금을 노리고 대거 다코타로 이주하기 시작한다. 이 곳에 살고 있던 [[수우]] 족은 백인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, 분쟁은 1876년 [[리틀 빅혼 전투]]로 절정을 이루었다. 커스터 중령은 결국 이 전투에서 수우 족의 전사이자 추장이었던 [[성난 말]]과 동맹으로 도와준 [[웅크린 황소]]와 함께 3,000명이나 되는 원주민들에게 포위되어 부하인 265명의 미 육군 기병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